나의 비전(Vision)과 소명 확인하기(Ⅲ)


는 독일 솔링겐(Solingen)‘병원 선교 세계 대회’에서 성령 세례를 받았다. 그때는 내가 거듭난지 8개월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정확하게 1979년 7월 말 이었다. ‘심판대와 천국’을 본 이후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이었다. 그 체험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나는 자주 울면서 길로 다니곤 했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다니면서 전도했다. 대학교 도서관 휴게실에서 전도하던 내 눈에서 눈물이 글썽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한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꼭 풀어야 할 ‘숙제’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신학교를 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우리 선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상담했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신앙인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모두 ‘꼭 신학교를 가야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이었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발등의 불’은 끈 셈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불은 타고 있었다. 하던 공부를 계속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지고 경제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선교회를 통한 교민 선교와 학생 선교에 열중하는 유학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전도는 나의 ‘주무’가 되어버렸고 학업은 그다음이었다.


 1984년 4월이었다. 교회들이 부활절을 즈음하여 수양회를 개최하는 기간이었다. 나는 이미 Bonn 대학교에서 학-석사(Diplom)를 마치고, 쾰른대학교(Koeln University)의 에너지 경제연구소장 밑에서 박사학위를 시작하고 있었다. 에너지-자원경제학을 전공하던 나는 ‘호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자원 수출정책’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로 하고 자료를 수집하던 시절이었다. 어언 결혼도 하고 아이 둘까지 가졌던 우리 부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한인교회가 주최하는 봄철 수양회를 갔다. 나는 수양회를 주최하는 교회를 알고 있었고 그 교회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수양회가 은혜롭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5박 6일 동안 집회가 진행되고 5일 밤을 내내 철야 기도로 보내는 집회였다. 집회가 은혜로워서 참석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모두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떠나온 터라 조금은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나도 은혜를 사모하며 그곳에 왔었다. 내가 열망하던 것은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과 ‘은혜 충만 세 가지가 나의 사모의 대상이었고 기도하고 싶었던 제목들이었다. 나는 예전과 같이 ‘울고 다니는’ 은혜의 날을 사모했고 전도하면서 내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날들이 다시 왔으면 하고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집회 셋째 날 밤이었다. 철야를 하고 있었다. 새벽 3시쯤 되었던 무렵이었다. 나는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하나님, 제게 성령의 충만을 주세요, 말씀 충만을, 은혜 충만요”하고 거듭거듭 열심히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그렇게 “성령 충만, 말씀 충만, 은혜 충만”하면서 기도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말들이 지금 내 입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너는 전도자가 될 것이니라, 너는 전도자가 될 것이니라, 너는 전도자가 될 것이니라”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에 나는 하나님이 내 입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소명과 비전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전도자가 되는 것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내가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 독일로 돌아와서 거기서 그를 섬기는 것은 그의 온전하신 뜻이라는 것’

소명(Ⅰ)  소명(Ⅱ)

런데 나는 그 메시지를 받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보니 그것은 현재 내가 구상하고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기도하다 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로 가서 잠자리에 누워버렸다. 다음 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난리’였다. 모두 은혜받고 기쁨이 많다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온종일 ‘죽을상’을 하고 다녔다. 기분이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것을 받을 수가 없고…마음이 언짢아서 집회 장소에서 떠나고도 싶었다. 나는 내 속에서 하나님과 ‘언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태껏 하나님이 경제학 공부를 계속하게 하셔서 이제 박사과정까지 왔는데…지금 나를 지도하는 교수는 서독 연방정부와 수상의 경제평가 교수단의 단장으로 계시는 분인데…. 교수로서 실력자인 데다 서독의 대학에서 유일하게 에너지 경제연구소를 책임지는 소장인데…. 나도 앞으로 한국에서 자원-에너지 경제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이제 와서 어떡하란 말입니까?


날 밤 집회시간이었다. 설교를 듣는데 저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철야기도시간이 왔다. 나는 기도를 ‘하는 둥 마는 둥’하다가 졸고 있었다. 옆에서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요란하게 기도하는 바람에 졸음에서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었다. 잠깐 기도실 밖으로 나가서 복도에 차려놓은 커피대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만들어 마셨다. “정신을 차려야지 그리고 기도해야지.” 이렇게 다짐하고 기도실에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았다. 하나님과 ‘담판’할 심산이었다: “하나님, 저더러 전도자가 되라시는 데, 그럼 제가 그 전도자를 어디서 하죠? 언제 하죠? 어떻게 하는 거죠?" 세 마디 질문을 드렸다. 구체적인 응답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라는 질문은 곧바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응답을 불러왔다.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네게 앞으로 2년의 시간을 주겠다. 네가 지금 하는 경제학 박사 논문을 끝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가라. 네가 교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신학을 하라. 네게 3년을 주겠다. 한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오너라. 여기서 나를 섬기라”.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일리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좋은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어요? 그보다는 더 확실한 사인(Sign)을 주세요. 그 이야기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도록 결재를 해주세요. 말씀으로 인을 쳐 주세요, 도장을요”. 그렇게 말한 후 조금 기다리니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성경 말씀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니라”라는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내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마음속에서도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야말로 강 같은 평화가 내 마음을 휘감았다: “맞습니다, 하나님. 그럼요, 그렇게 하고 말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치듯이 하면서 하나님과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에게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성령은 그 말씀의 해석을 들려주셨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전도자가 되는 것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내가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 독일로 돌아와서 거기서 그를 섬기는 것은 그의 온전하신 뜻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거기에 내가 화답을 하자 나의 영혼은 창공을 날듯이 기뻐 뛰었다. 불순종하던 마음이 계시를 받더니 어느 순간부터 ‘독수리 날개치고 하늘로 올라가듯’이 비상하고 있었다.

 

이후 나는 2년 만에 논문을 끝냈다. 학위논문은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되었다. 나는 학위 시작 2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했다. 때마침-하나님의 섭리 아래-서울의 단국대학교에서 교수 자리가 생겼다. 석사 때 전공한 교통 경제학도 아울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자리였다. 나는 나가자마자 상경대학 무역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1년 후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신학 공부를 위해 아세아연합신학원 M.Div. 과정에 등록했다. 사실 사직하기 바로 전 학기에 나는 무역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확고부동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독일에서 나올 때부터 3년 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갈 각오를 하고 귀국했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선교사로서 한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갈 채비를 완료했다. 우리는 한국 오엠(O.M)국제선교회에 허입되었다. 다시 독일로 가는 길은 오엠(O.M)선교회를 통해서였다. 주께서 그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는 독일 오엠(O.M)의 난민 전도팀에 조인(Join)하여 프랑크푸르트에 배치되었다. 하나님이 예전에 거기 와서 섬기라고 말씀하셨던 곳이었다. 세 아이와 아내와 나는 하나님이 6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이번에는 선교사가 되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오엠(O.M)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독일로 돌아간 날은 1991년 1월 1일이었다. ‘하늘에서 보이신’ 비전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었다.


written by Jonathan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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