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들과 왕들

textsms 신앙칼럼#15

 

이 글은 내가 Derek Prince, Shaping History Through Prayer and Fasting(2002)을 읽다가 마지막 세대의 교회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주제로 인식하고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위에 거하는 그의 믿는 백성- 각 민족과 그 정부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사안들에 대한 권세를 위임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과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맡겨진 권세를 사용하기를 기대하신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성경의 가르침과 원리들은 바로 그런 엄연한 사실을 들려준다. 그같은 메시지는 수많은 믿는 신자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여러 민족들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허다한 사건들을 통해서 입증된다.

사람의 입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God's words in man's mouth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한 가지 실례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전기에서 발견된다. 예레미야서가 시작되는 처음 10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예레미야를 "열방을 위한 선지자로"(1.5) 세우셨다고 선언하신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겐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노라고 반박한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십시오, 주님, 저는 소년에 불과합니다."(1.6)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시지 않고 그의 소명을 더 강한 조건을 걸어 재차 확인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종결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1.10)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워진 권위자로 부각되고 있다면 한 젊은이의 위상치고는 대단히 격상된 포지션이다. 이것은 일반 세속적인 정치상의 권력보다는 한층 더 높은 권위이다. 외관상 나타난 그의 권세를 보면 의심이 갈 수 있는 말이다. 예레미야가 살아간 전기를 보면 그렇게 판단된다. 사실 그의 삶은 오히려 불행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거의 보편적으로 거부되었고 그 자신은 계속된 핍박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는 수개월에 걸쳐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고 여러 차례 처형의 위협과 아사 상황에서 죽음직전까지 가는 위험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예레미야의 권위와 그의 메시지를 신원해 주었다. 그의 예언적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근동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주변국가들과 여타 다른 민족들의 명운을 결정지었다. 이제 근 25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역사의 객관적 조명을 통해서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모든 세기를 일관해서 그가 예언했던 모든 민족국가들의 운명은 그의 예언을 정확히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라서 그들 민족들의 자취를 더 자세하게 추적하면 할수록 그들의 역사가 정확하게 그의 예언에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예레미야는 사실적으로 "그 모든 민족과 왕국들 위에 세워진" 권위자였고 자신이 선포한 예언의 메시지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운명을 실제로 좌우한 중재자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같이 엄청난 권위의 베이스가 되었는가? 대답은 예레미야1.9절에서 발견된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레미야의 권위는 자신의 입에 두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들이 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발하시는 말씀의 효력과 같이 예레미야의 입에서도 강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귀착된다. 그의 말씀이 최후의 결정인자이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그 말씀이 그를 믿는 인간의 입을 통해서도 나오게 하신다. 그런 말씀이 공공연히 전달되는 예언의 말을 통해서나 권위있는 성경강론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보다도 더 흔하게는 기도의 밀실에서나 청원이나 중보상의 기도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대목은 예레미야가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세속 정권에 대해서 두가지 면으로 관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의 신민으로서 왕과 방백들로 대표되는 유다왕정에 복종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정치적인 전복이나 무정부를 설교하거나 실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을 처벌하려고 내린 정부의 불편부당한 조처를 회피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예언사역을 통하여 예레미야를 한층 높은 영적 차원으로 부상시키시고 자연적인 차원에서 복종관계아래 있는 그가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자들 위에서 영적인 권위를 사용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권좌에 함께함=sharing the throne with Christ

예레미야의 전기는 신약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원리 하나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원리란 모든 그리스도인이 두 국적=dual citizenship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에 의한 출생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국적을 가지며 자국의 합법적인 정부가 부과하는 규정과 의무를 지켜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영적 출생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왕국시민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라고 말한 배경이다.

하늘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왕국' 즉 하나님의 왕국의 법질서아래 있다. 왕국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그는 또한 그 왕국의 권위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다윗이 시103.19절에서 말한 그 왕국이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에 있는 모든 다른 왕국들과 활동하고 있는 모든 다른 세력 위에 군림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왕국권세를 그의 왕국백성들과 나누기를 원하신다. 이 사실이 눅12.32절에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말씀을 통해 확인된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약속이 주는 위로는 양무리의 힘이나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가 "적은 무리여"(눅12.32), "이리들 가운데 있는 양떼"라고(마10.16)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신자인 우리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이 확실성은 하늘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 =good pleasure 위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목적을 따라"(엡1.11)-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점하고 있는 위치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 사실을 바울은 엡2.4-6절에서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의 은혜는 3단계에 걸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되게 하신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we are "brought...to life".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과 같이 무덤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았다=we are "raised...up".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하늘의 왕국의 보좌에 앉히움을 받았다=we are "enthroned". 우리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미래에 속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모든 진리가 기정사실을 의미하는 과거시제로 언급되고 있다. 이 3단계의 각 단계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신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

엡1.20-2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높이심을 받은 탁월한 위치의 권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대뿐 아니라 오는 세대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권위가 모든 다른 형태의 권위나 정권을 제거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의 권위가 모든 다른 권위 위에 군림한다고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같은 진리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에게 두 번에 걸쳐 주어진 타이틀에 의해서 드러난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란 칭호에서 말이다(계17.14,19.16). 그리스도는 모든 주관자들 위에 계시는 출중한 주권자시며 모든 정권을 호령하시는 통치자가 되신다. 보좌에 앉으신 그가 이 신분을 가지고 다스리시면서 그의 믿는 백성들에게도 이 포지션을 주신다=This is the position on the throne that He shares with His believing people.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이 놀라운 권세의 위력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에베소서에서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엡1.17-20)

이 계시는 자연적인 사고력이나 감각적인 지식을 통해서는 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계시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눈이 열리도록 하시고 우리들에게 두 가지 서로 연관된 진리를 보여주시는 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현재적 권위가 온 우주를 통괄하는 출중한 권세이며 둘째, 그리스도를 그같은 권세의 자리에 올린 그 동일한 권세가 이제 또한 "믿는 우리들 안에서"도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고전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놀라운 진리를 계시해 주신 분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에 통달하시는 거룩하신 성령에 의해서만 그같은 계시가 주어진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7-8).

이 "비밀하고 숨겨진 지혜"는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로서 계시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면서 그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2.9-10)

이런 종류의 지식은 감각을 통하여서도, 인간의 사고나 상상력을 동원한 내면세계로부터도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조명해주셔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바울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고전2.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포지션이다. 바울은 여기서 두 종류의 지식을 대비했다. "세상의 영"은 세상의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진 국적과 그에 따르는 모든 책임과 권리에 대한 제반 사항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 안에서 주어진 우리의 신분을 우리에게 계시해준다. 이 영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로서의 우리의 권리와 책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때때로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은 자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주시는 계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이 부여하는 혜택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누릴 수도 없다. 왕으로서 다스리기는커녕 우리는 노예로서 여전히 노역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노예에서 왕의 신분으로=from slaves to kings

하나님은 시작부터 땅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인간과 함께 나누시길 원하셨다. 인간에게 땅에 대한 지배권을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시115.16절은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창1.26절은 인간의 원초적인 창조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지배자로서의 포지션을 잃어버렸다. 순종하면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대신에 그들은 죄와 사단에게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상실되었던 지배권은=dominion authority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회복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땅에 대한 이 지배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힘주어 천명하고 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이것은 아담의 범죄이다-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 아담의 불순종이 초래한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결과 모두는 지금의 이 삶 가운데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사망은 이제 불신자들 위에 왕노릇하지만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에 의해서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좌에 동참하기 위하여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

인간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의 원래의 목적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는 인간을 노예의 신분으로부터=his position of slavery 격상시켜서 지배자의 신분으로=his position of dominion 회복시킨다. 구약에서는 이 진리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시위되었다. 출19.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제사장 왕국"이 된다는 이 말은 지배권이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즉 노예의 자리에서 다스리는 자의 자리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2중적인 특권을 제공하셨다: 제사장으로 섬기고 왕으로서 다스리는 특권이다. 다니엘과 같은 몇몇 특출한 인물들은 이 귀한 소명에 응답하여 부르심을 성취했지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대체적으로 보건데 이같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감당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신약에 들어와서 하나님은 그가 처음 이스라엘에게 "발부했던" 초청장을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 재차 그 초청장을=calling 발부하신다. 벧전2.5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라는 권고를 받는다. 이것은 신자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말이다. 새 언약의 제사장으로서 신자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드려지는 "신령한 제사"는 기도의 다양한 형태 -특히 워쉽과 중보=worship & intercession 이다. 그 다음 벧전2.9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이 "왕같은 제사장"=a royal/kingly priesthood 이라 불리어진다. 이 "왕같은 제사장"이란 정확하게 출19.6절이 말하는 "제사장 왕국"=a kingdom of priests에 일치하는 말이다.

계시록에서는 같은 말이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 두 번에 걸쳐 적용되고 있다. 계1.5-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다시 계5.9-1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구속함을 받은 자기 백성을 "제사장들의 왕국"으로=a kingdom of priests 삼고자 하신다는 이 하나님의 목적은 성경전체에서 모두 4회에 걸쳐 선포되고 있다. 즉 구약에서 1회, 그리고 신약에서 3회에 걸쳐 나오고 있다. 신약에서 이 선언이 언급될 때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미래 어느 시점에서 성취 될 그 무엇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된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성취된 사실로서 제시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로 다스린다=we rule by prayer

시110.1-4절에서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왕과 제사장의 포지션을 가지고 자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다스리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 장면에서 묘사된 하나 하나의 내용이 모두 의미심장한 것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면밀한 주의를 요구한다. 다윗이 여기서 표현한 영감된 언어와 이미지들은 연관된 다른 성경의 말씀들과 대비해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시110.1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왕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본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신약에서 인용된 말씀들 가운데 이 말씀보다 더 자주 인용된 구약의 말씀이 또 없을 것이다. 복음서의 세 곳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이 말을 인용하시면서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마22.44, 막12.36, 눅20.42-43). 이 말씀은 또한 오순절에 행한 설교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적용한 말씀이기도 하다(행2.34-35). 그리스도의 왕권에 관한 진리는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시2.6절에서 다윗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110.4절에서 다윗이 묘사한 그림은 그리스도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계시하면서 완성되고 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임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서의 모든 강론이 시편110편의 이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 안에서 왕과 제사장의 두 역할이 통일을 이루고 있다고 강조한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그에 더하여 그는 그의 이름이 예시하는 바와같이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었다(히7.1-2).

그리스도께서 지금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행하시고 계신 사역이 바로 이 2중사역이다.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다스리신다.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중보하신다:"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intercession 이니라."(히7.25).

시110.2절은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이것은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아직은 최종적으로 제거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그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대해 적대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등극해 계시고 그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보유하고 계신다. 그런 이유에서 이제 그는 "그의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고 계신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주의 권능의 홀"을 말한다.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다스리신다. 성경에서 "홀"은 통치자의 권위의 대명사=mark 이다.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이 애굽에 내려졌다. 나중에는 이스라엘민족이 보는 앞에서 홍해의 물이 갈라지는 역사도 일어났었다(출7-14장).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레위족속의 두령으로서 아론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민17.3). 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그의 권위는 그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효력을 낸다.

다윗이 묘사하고 있는 그림에서 그 "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미는 것이 아니라 "시온으로부터" 내어 보내진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assembly of God's people 가 있는 장소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에서 히브리서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히12.22-23). 하나님의 왕국 시민권이 부여하는 권리를 따라 우리는 시온산의 이 회중 가운데 우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2중사역이 부과하는 영역 안에서 우리가 점한 부분을 감당하게 된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와 중보사역에 참여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만약 왕으로서 다스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섬겨야 한다. 제사장적 사역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일은 우리의 왕적 권위를 행사하는 일에 열쇠가 된다. 기도와 중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우리 것이 되는 권위를 행사한다.

다윗이 시110편에서 보여준 그림은 교회의 기도사역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적하고 그의 왕국의 전진을 방해하면서 온갖 죄와 적대행위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원수 중에서=in the midst"(시110.2) 그리스도인들은 왕국질서 안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모여야=assemble 한다. 그들의 회중으로부터=out of their assembly=ekklesia 그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권위의 홀이 그들의 기도를 통해 내어 보내진다. 그 홀이 내어보내진 곳이 어디든지 거기서 악의 세력은 무릎을 꿇어야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는 높임을 받고 그의 왕국은 전진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제거될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날에 그리스도는 모든 눈이 목격하고 온 천하가 시인하는 가운데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 날이 올 것임을 확실하게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된 미래의 영광에 매료된 나머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권위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세대에서도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중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우리 또한 그와 함께 다스린다. 그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된 그 놀라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책임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악한 세력의 면전에서 그리스도가 이미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계17.14). 이것 또한 회피할 수 없는 우리의 책임이자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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