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티머시’

[TESTIMONY#26]

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지 못하고 영적으로 피폐한 삶을 산다면 ‘손해’는 다만 내편에 있다.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나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을 찾는다는 개념도 많은 경우에 매우 생소하다. 우리는 그가 그토록 원하시고 우리들 자신에게 절실한 인티머시를 이루지도,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하나님을 찾았다면 순전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은 곧잘 구한다. 우리는 상황이 긴박하면 비상벨을 울린다. ‘물질’이 필요하면 매달린다. 자녀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즐겨’ 그를 찾는다. 성령의 은사나 어떤 영적체험이나 능력을 받기 위해 그를 찾는 것은 그래도 ‘수준’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인티머시는 그런 외적 충동을 받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물질적 필요를 따라 유발되지 않는다. 다만 내적인 허기와 목마름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아무런 현실적 필요가 없어도 그를 찾는 것이 인티머시의 시작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좋아서 찾는 것이다. 그를 사모하여 갈구하는 것이다. 인티머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영적 갈망이다. 인티머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는 관계유지이며 영적 교제이다. 인티머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고의 영적 예배이다. 동시에 인티머시는 몸 안에서 그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실제적 서비스이다!


약간은 묶은 이야기지만 인티머시와 연관된 체험담 하나를 나누고 싶다:

2007년 2월에 한국에서 집회 차 런던에 오신 어떤 목사님의 말씀증거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분은 ‘십자가와 성령’ ‐컨퍼런스를 개최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근 7년만의 재회를 가졌다. 그는 여러 말씀 가운데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의 부류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모세 같은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 같은 타입이다’라는 것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만을 구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길을 알기 원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원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문제해결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행위를=his ways 모세에게, 그 행사를=his deeds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기뻐하셨지만 당대의 이스라엘 자손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다. 그들은 버림을 받았다.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내가 받은 메세지는 대강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깊게 책망을 받았다. 나의 ‘영성’을 지적한 것이라 양심에 가책이 일어났다. 나는 거기서 결단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겠다고. 그리고 나의 ‘관념’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나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역하는 ‘외압’에서 벗어난 지가 몇 해 되었다. 이제 순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역할 수 있는’ 환경이라 여기고 있던 날들이었다. 외관적 접근과 업적을 기준하여 내 자신과 사람을 정의하는 관습을 멀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날이었다. 말씀을 들은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나의 뇌리 한 구석에 여전히 그 같은 ‘관념’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내게 책망을 주셨다. 기회가 주어져 나는 회개하는 마음을 그분과 현지의 교회지도자들이 임석한 자리에서 나누었다.

령께서 그때부터 나를 새롭게 다스리기 시작하셨다. 그는 최근에 일어난 이슈 하나를 생각나게 하셨다. 그것은 내가 섬기고 있던 영국교회 지도자와의 갈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 경위는 어떠했더라도 나의 마지막 처신이 온전치 못했다는 지적이셨다. 성령은 나에게 ‘난처한’ 과제를 주셨다. 나는 순종을 결심했다. 그날로 즉각 그를 찾아가서 허심탄회하게 용서를 구했다. 조건 없이 나를 부인하는 자세를 보였다. 진솔하게 나를 낮추고 주께 영광을 돌렸다. 그 시간 이후부터 나는 성령 하나님과 깊은 교제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두 달 남짓 기간에 걸친 ‘성령 하나님 사모하기’는 나에게 거의 날마다 ‘깊은 영교’ 가운데 들어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날마다 묵상하는 말씀은 깊은 말씀의 깨달음을 주었고 때로는 ‘계시’의 차원으로 진전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성령은 나에게 주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도록 환상과 같은 그림을 많이 보여주셨다. 그 중의 하나를 나누자면 다음과 같다:

그날에 주신 은혜는 주님과의 인티머시에 관한 환상이었다. 그것은 시91.1절 말씀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은밀한 곳’에=the secret place 대한 설교나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었다. 특히 최근 들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에 관한 실제적 체험이 없었던 관계로 그 의미를 잘 몰랐다. 2006년 8월부터 나는 Todd Bentley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그의 책을=The Reality of the Supernatural World 읽은 후 나의 ‘허기’는 더욱 깊어갔다. 실제로 그때부터 나는 ‘초자연적 세계’와 ‘실제적 능력’을 향한 제2의 순례에 들어간 셈이었다.

는 1993년경에 영국내의 모슬렘 사역에 들어가면서 실제적 능력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능력기독교’에 대한 순례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의 새로운 차원의 순례는 그 연장선상에 있긴 하지만‐ 그리고 2006년 마지막 몇 달을 기도와 금식의 기간으로 삼고 ‘성령 하나님 사모하기’에 들어갔었다.

2007년 초반의 ‘유쾌함’은 물론 올 해에 주신 성령의 은혜겠지만 지난해의 결심과 ‘안식’의 결실이기도 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in the secret place of the Most High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거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이제는 생생하게 다가온 체험이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1‐23)고 말씀했던 그 ‘반석 위에 서며 반석 틈에’를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아가서의 이 구절이 이해가 되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여기 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라는 것을 마치 나의 경험처럼 이해하게 되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밀애를 노래하는 시이다. 또한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 곧 주님과 나와의 은밀함을 칭송하는 ‘밀애서’이다. 그것은 인티머시의 극치를 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환상에서 마치 땅에서 위성을 쏘아 올리듯이 나를 태운 로켓 ‘디스커버리’가 불을 토하며 상공으로 올라가더니 어느 바위들로 깎아 세워진, 절벽의 ‘뒤 산으로’ 가서 거기다가 나를 풀어 내렸다. 그곳은 바위들만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그 높고 높은 산은 완전히 절벽이었다. 여기 저기 바위들이 즐비한 가운데 한 바위덩이가 나에게 지정되어 있었다. 그 바위는 세 단계로 되어 있었고 두 틈이 그 안에 있었다. 한 틈에 내가 들어가고 다른 틈은 ‘누구를’ 위해 지정된 것 같았다. 나는 거기서 ‘그분’을 만나고 있었다. 내가 매번 그곳에 가서 기다리노라면 ‘그분’이 옆의 광활한 고지 같은 곳에서부터 오셔서 나를 만나 주셨다. 거기 바위산에는 나의 ‘면회 장소’뿐 아니라 여기 저기 다른 이들을 위해 지정된 ‘틈’들이 즐비해 있었다. 지정된 바위틈에서 한번 면회하고 난 후부터 나는 그곳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곳이 나의 은밀한 곳, 곧 지존자를 만나는 ‘the secret place’ 였다. 그런데 그 바위틈은 수직의 바위가 아니라 30‐40도 각도의 비스듬한 바위틈이었다. 내가 그 안에서 정면 위로 바라볼 수가 없는 바위 틈, 비스듬히 내다 보아야 하는 그림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분’을 사모하노라면 나는 그곳에 다시 들어가서 ‘그분’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그는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 나는 그의 양이다. 나는 그를 알고 그도 나를 아신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아는 고로 따르는 법이다(요10.4). 목자도 양을 사랑하는 고로 그를 찾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와 교제하고 있으면 관계는 성립된다. 관계가 친숙하면 교류는 이루어지는 법이다. 친구란 무엇인가? 친구간의 참된 표지는 무엇인가? 그가 나의 친구라는 참된 표지는 나에게 자신의 ‘숨은=비밀스런 기쁨’을 말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내심을 토로할 수도 있겠지만 인티머시의 궁극적인 표지는 그가 나와 자신의 ‘숨겨진 기쁨을 나눈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내가 내 마음을 묶어서 그에게 ‘바치면’ ‐우리는 이것을 ‘항복한다’는(surrender)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는 자기의 뜻을 알게 하신다. 내가 “주님의 뜻만이…”라고 고백하면 그는 자기의 비밀을 노출하신다. 내가 그를 두려워하며 “주님,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면 주님은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비밀을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시25.14절의 뜻이다. 조그만 것이지만 우리가 “주님, 그것…”하고 중얼거리면 주님은 자신의 자상하심을 우리의 일상에서 체험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는 그 정도로 우리와 가깝게 ‘지내신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만사’가 모두 그래야 한다! 큰 일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공동체 안에서 섬길 때나 불신 사회를 위한 사역 중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생전에’ 그런 습관을 따라 일하셨다(요5.19). 그는 아침마다 아버지를 만나시고 그가 주시는 ‘사역의 내용’을 받아오셨다(사50.4). 그는 날마다 ‘여호와의 어전회의’에(divine council) 들어가서 그가 회의 가운데서 하시는 말씀과 회의가 끝나고 ‘지시하는 사항’을 듣고 나오셨다(렘23.18).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패턴은 그를 뒤따른 제자들과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모델이 된다. 성령과 인티머시를 나누면 그 같은 사역패턴이 나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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